-선각자 사주당 이씨-
뱃속에 있는 태아는 인간의 일생 중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한다. 그리고 태아가 태어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인성과 능력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결정된다는 것에 대하여 전문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엄마들은 임신을 하게 되면 태아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맑은 물과 깨끝한 음식을 먹으며, 건전한 육체와 정신을 갖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바로 태교이다. 태교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태어나는 아이의 성품이나 지능지수가 결정되는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태교의 중요성을 이미 17세기 이 땅에 살던 한 여인이 깨닫고 ‘태교신기(胎敎新記)’라는 책을 써서 사람들을 계몽시키려 노력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울 일이며, 우리 용인여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사주당 이씨는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실학적인 사상을 간직하고 인간존중의 철학을 중시했던 위대한 여성이었다.
-생애와 주요 업적-
사주당(師朱堂) 이씨는 본관이 전주이고, 작위는 숙인(淑人)이다. 경녕군(敬寧君)의 11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창식(李昌植)이고, 어머니는 좌랑(佐郞)을 지낸 강덕언(姜德彦)의 딸이며, 1739년(영조 21년) 12월 5일 청주에서 태어났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여 사서삼경을 두루 섭렵하였기에 그 문장이 어느 선비보다 뛰어났다. 또한 당시의 여인네들이 해야 하는 길쌈, 바느질 등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그 소문이 널리 퍼졌다.
숙인은 15세 되던 해에 21세나 연상인 36세의 유한규(柳漢奎)와 결혼하였다. 유한규는 학문이 높은 사람으로 이미 부인을 잃고 다시 장가를 갈 생각을 않고 있었는데 이씨의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이라면 자기의 노모를 잘 모실 것이라 믿어 청혼을 하였다고 한다.
사주당 이씨는 친정에서 익힌 글을 시집을 와서도 남편과 함께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이들을 가르칠만한 내용들을 모아 육아독본으로 책을 지었는데 이것이 ‘교자집요(敎子輯要)’로 나중에 숙인의 대표적 저술인 ‘태교신기’의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45세 되던 1783년(정조 7년)에 남편 유한규가 목천현감으로 임명된지 4년만에 66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씨는 남편의 고향인 용인시 모현면에 그 시신을 묻고 자녀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다.
숙인은 아들 유희의 봉양을 받다가 83세 되던 1821년(순조 21년) 9월에 죽었는데, 장사지낼 때 남편의 관을 옮겨 합장하였다. 유언으로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의 편지와 남편이 저술한 ‘성리답문(性理答問)’, 그리고 자신이 필사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입던 옷과 같이 관에 넣어달라고 하였다니 죽음에 이르러서도 부도(婦道)를 다했음을 알 수 있다.
-태교신기와 다른 저서들-
‘태교신기’에서는 태아를 가지고 있는 임산부의 마음가짐과 행실은 어떠하여야 하며, 보고 듣고 거처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여야 하고, 음식의 섭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이씨는 경전의 예법들을 참고하였고, 옛 성현들의 훌륭한 말씀을 종합하여 귀감으로 삼았으며, 또한 의학적 이치를 참작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낳아 기른 네 자녀에 대한 태교의 경험이었다. 숙인은 두 아들과 두 딸 등 네 자녀를 두었다.
이 책은 한 번만 쓴 것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서 수정‧보완‧정리되었다. 책을 완성한 때는 숙인이 62세 즉 진갑이 되던 1800년(정조 24년)이었다. 책이 완성된 후에는 아들 유희(柳僖)가 1년 동안 장과 절로 글귀를 나누고, 주석을 붙였으며, 음의를 한글로 해석하는 일을 하였는데, 마침 그의 생일날 일을 마쳤다고 한다.
사주당은 이 밖에도 여러 책을 썼지만 여자가 지은 책은 긴요치 않으니 모두 태우되 ‘태교신기’만은 남겨두어 후대에 전하여 아녀자들의 거울로 삼게 하라고 하였다. 다른 책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묘역 참배-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사주당 이씨의 묘역은 용인시 모현면 노고봉에 있다. 그러나 안내판도 눈에 띄는 것이 없고, 안내자 없이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한적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처음 찾아가는 사람들은 헤매기 일쑤다.
필자도 몇 번의 시도 끝에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묘역을 참배할 수 있었다. 비석의 전면부 우측에는 ‵통훈대부 유한규 지묘‵라 쓰여 있고, 좌측에는 ‵숙인 전주이씨 사주당 부좌‵라 쓰여 있다. 근처 약 300m 쯤에는 조선시대 국어학자로 유명한 아들 유희선생의 묘역이 있다.
글 : 조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