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사적 인물 중 이주국 장군은 생전의 명성에 비하여 지금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조선 2대 정종의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1721년(경종 1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서 태어나 77세인 1798년(정조 22년)에 생을 마쳤다. 20세 되던 해인 1740년 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시작으로 절도사, 포도대장, 총융사 등의 벼슬을 거쳐 병조판서에 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고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타인과 반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일생 동안 여러 번에 걸쳐 파직, 유배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영조실록 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정조 때 이주국 장군이 총융청 대장으로 있을 때였다. 그는 강한 군인들을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애썼다. 어느 날 손수 백사장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훈련에서 꼴찌를 한 병사에게 곤장을 치는 벌을 내렸다. 그런데 불행 하게도 그날 꼴찌를 한 병사는 몸이 약한 사람이라 이주국 장군의 곤장 몇 대를 맞고는 어이없게도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죽은 병사의 어린 아들을 자청해서 맡아 키웠다. 그러나 죽은 병사의 아들은 그의 밑에서 성장 하면서도 그를 부모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병사의 아들이 야밤을 틈타 이주국 장군을 해치려 하였다. 이주국 장군은 죽부인을 이불에 씌워서 이 위기를 모면 하였다.
그리고 이주국 장군은 병사의 아들에게 자기의 잘못을 빌고, 또한 병사의 아들을 용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병사의 아들은 이주국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현재 문촌리 414-4번지에는 이주국 장군의 생가로 알려진 고택이 2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서 있다. 이 고택은 2000년 3월 24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로 지정 되었다. 고택 안채의 망와(望瓦)에 기록된 명문을 보면 이 가옥이 1753년(영조 29년)에 건축된 곳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자료로 지정되기 전인 1989년에 경기도 전통건조물 제3호로 지정되었는데 당시에는 가옥 소유자의 이름을 따서 “ 정영대 가옥 ”이라고 불렀었다.
이 가옥은 동남향으로 본래 소슬대문, 중문, 안채, 큰사랑채, 행랑채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최근 복원한 것으로 지금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3동으로 구성 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한 가운데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이 있고 그 앞으로 3칸의 날개를 달아 부엌, 광이 있다. 그리고 부엌날개의 반대편으로 안방 뒤에 한 칸을 내달았으며, 대청 맞은편 건너방 앞으로도 반 칸을 덧달아 지붕은 工자형의 한 쪽 날개가 생략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랑채는 4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왼쪽에 청방이 있고, 가운데 2칸에 방과 마루가, 오른쪽에 다락방과 아궁이가 있다.
행랑채는 길에 면하여서 7칸반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슬대문 옆으로 2칸의 방을 들이고 4칸은 창고로 되어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마당과 안마당이 연속되어 있으나 원래의 모습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오른쪽 모퉁이를 기점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구획하는 담장과 중문채가 있어서 각각의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동선과 시선도 분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가옥 구조는 경기도 지방의 품격 높은 가옥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택의 규모는 28.25 평, 사랑채 13.81평, 행랑채12.1평 곳간채2.06평, 등 총 건평 57.28 평, 대지가 428.9평 이다.
고택에서 멀지 않은 문촌리 산 35-1번지에는 1986년 5월 31일 향토유적 제 4호로 지정 되고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묘역에는 일반적 규모의 봉분에 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석수,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소에서 남쪽으로 150m 지점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 둘러 싸여 묘소에서는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안내문에는 묘비가 있다고 표기되어 있지만 ,현재 묘비는 없으며 무인석과 문인석 도 없고 망주석과 석수(石獸) 가 놓여 있는 점이 다른 묘소와 차이점이다.
석수는 말과 양으로 양의 뿔과 꼬리, 말의 갈퀴와 고리등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조선시대후기 사대부 묘제의 한 유형으로 볼수 있다.
이주국 장군이 살던 시대에는 문촌리 일대가 전주이씨 이주국 장군의 집안 소유 땅이 엇다고 한다.
현제 마을에는 이주국 장군의 7대 후손들이 살고 있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땅은 많지 않다.
신도비 가 위치한 곳은 후손의 소유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소유라고 한다.
신도비에 들어 서는 길도 없다.
이주국 장군의 할아버지, 할머니 , 아버지, 및 증손 등의 묘가 마을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