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수(1867년 2월2일)는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 어현(느리재)에서 오태한과 김규일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성수, 자는 경수 이며 본관은 해주로 호군공 오희보의 13대손이였으며 부인 이남천(1872-1957)사이에 4남매를 두었다.
또한 18세부터 사냥으로 시작해 용인,안성,여주 일대에서 그의 사냥으로 전국을 더도는 바람에 29세 때에야 첫아들인 (성묵 후일 광선으로 개명)을 낳았다.
그 이후 용인과 죽산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용인을 비롯해 안성, 수원 등 경기남동부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1905년 4월말에서 5월초 무렵 농민출신 이인응이끄는 부대이며 일본 헌병사령부는 시찰부대를 파견해 원삼(당시 죽산) 군 원일면에서 의병 3백여 명과 격돌한바 있다.
, 오광선. 오희영 ) 독립운동가이며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곳은 길림성 액목현 이며 조부인 오광선는 1867년 2월2일 원삼면 죽능리 어현(느리재)에서 오태한 김규일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성격 또한 명랑하고 쾌활하였으며 말도 청산유수로 잘하고 남자처럼 활달한 성격이며 중학교 3학교 까지 공부를 하다 광복군에 입대를 하여 제 3지대가 있는 안휘성의 부양으로 가서 일본어를 배워 적 후방인 만주로 들어가 아버지(오광선)를 모시고 나오겠다고 최전방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오희영은 독립운동 투신으로 1939년 청년공작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광복군이 창립되자 거침없이 광복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는 여성대원의 일원으로 주로 선전운동을 담당하였고 광복군 창설 사실을 알리고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는 한편 중국인들의 대일 감정을 알리고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방법을 동원 하기도 하였다.
오희영은 그곳 제 3지대에서 신송식 을 만나 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 동지결혼” 을 하였다.
오희영여사의 남편인 신송식은 (1914-1973) 중국명으로는 진경성이라고 불렀다.
1914년 3월 4일 평남 안주군 입석면 입석리에서 출생하엿으며 그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933년 8월 광동정치군사학교 제 4기로 졸업하고 1963년 8월 중앙육군군관학교 제4분교를 제12기로 졸업 하였다.
그 이후 1937년에는 3월 육군 보병학교 간부훈련반을 마치고 4월 포병 소위로 중국군 중앙포병제 51단을 참가 하엿으며 장사맟 영남대회전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전과를 올렸다.
또한 조부인(할아버지) 오인수는 충절과 자유독립국가 건설에 기여해온 해주오씨이며 1905년 일제가 조선의 외교관과 군사권을 강재강탈하자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인 오광선(오희영)장군은 1896년 5월13일 오인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성묵이였으며 나이 12살 때 아버지( 오인수) 일본경찰과 일진회 회원들에 의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보았다.
취재 :조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