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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대한제국의 뿌리를 찾아서【 한북정맥 풍수지리 문화재 탐방조사 】

  • LV 1 승수기자
  • 조회 2612
  • 2011.11.17 16:43

인평대군의 묘역 및 신도비
(麟坪大君墓, 神道碑)는 경기도 기념물 제 130호로 지정되었다.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인평대군(麟坪大君)(1622~1658)의 묘역은 기와를 얹은 곡장(曲墻)으로 둘러 쌓인 1,800여평의 장대한 규모이다.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오씨(吳氏)와 합장된 단분으로 봉분 아래 8개의 장대석(長大石)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자리 잡고 있고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에는 사면(四面)에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으며, 좌우로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한쌍씩 배치되어 있다. 곡장 밖 좌측에는 비신(碑身 비의 몸체)이 없는 귀부가 있어 또 다른 묘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 뒤 오른쪽에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오른쪽 아래에 판석을 깔았다. 신도비는 효종 9(1658)에 건립되었으며, 귀부와 이수는 웅장하면서 화려해 정교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신도비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비문은 왕명을 받아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이 지었다.
<?xml:namespace prefix = v /><?xml:namespace prefix = o />인평대군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 고읍에 있었으나 숙종 19(1693) 8월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인평대군치제문비(麟坪大君致祭文碑)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인평대군치제문비는 글과 그림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던 인평대군이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형인 효종과 후대 왕들이 그의 인품과 업적을 치하하며 지은 비문으로 임금이 제문을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御製御筆) 비문이다. 치제문비에는 인평대군의 생애를 비롯해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겪었던 고초와, 그 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 외교에 중책을 수행한 공적 등이 적혀있다. 1비는 숙종 19(1693)에 쓰고 경종 4(1724)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 효종 후면엔 숙종의 어제어필이 새겨있고, 2비에는 상단에 영조, 하단에는 정조, 순조의 어제어필이 새겨있다. 인평대군치제문비는 조선시대 임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은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이름은 요(?),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인조 7(1629) 인평대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19(1640)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효종 2(1650)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사신)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학문에도 소양이 깊어 제작백가에도 정통하였고, ..(詩書畵)에도 능하였다. 특히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들어 왔던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그 자신의 작품으로 희귀하여 현존하는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산수도, 홍성하 소장의 노승하관도 老僧遐觀圖, 정무묵소장의 고백도 古栢圖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고백도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어, 맹영광의 공필법(工筆法)의 영향을 받아 상통하는 바 크며, 산수도는 다소 거친 필치등의 절파풍(浙派風)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외에 송계집·연행록·산행록의 저서를 남겼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인평대군 묘역에는 효종 9(1658)에 건립된 묘 및 신도비와 효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등이 직접 짓고 쓴 치제문비가 있다.
 
 

인평대군 묘역을 풍수지리적 감룡경의 구성론에 입각하여 감평해보면, 언뜻 보아서는 들판에 있는 평범한 묘역 같은데 과연 천하 대명당(大明堂)이다. 우선 산세를 살펴보자. 혈의 기세와 크기는 용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수도 서울을 만들기 위해서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평강 백암산(1110M), 김화 적근산(1073M), 대성산(1175M), 광덕산을 거쳐 포천 이동에 있는 백운산(904M), 국망봉(1168M), 도성고개, 강씨봉(830M), 오뚜기고개, 포천 일동면 청계산(849M), 원통산(567.3M), 현등사가 있는 운악산(935.5M), 진접에서 이동면 가는 47번 도로 운학힐사이드 휴게소가 있는 고개를 넘고 다시 포천에서 가평 현리로 이어지는 54번 도로인 굴고개를 넘어 수원산, 포천 내촌면 국사봉(546.9M), 큰넉 작은넉 고개를 넘고 소흘읍 고모리에 있는 죽엽산(600.6M), 광능의 주산인 운악산(234.8M), 광릉수목원 뒤 용암산(476.9M),을 지나 의정부에서 포천가는 43번 도로 축석령을 가로질러 백석이 고개까지 온다.
 

여기서 한북정맥은 서남 방향으로 의정부를 거쳐 도봉산으로 향하게 하고, 한맥은 다시 분맥하여 역으로 돌아 북으로 향하니 천보산맥이다. 소흘읍에서 주내가는 350번 도로 어야고개를 지나 석문령, 귀율동 마을로하여 송우리에서 덕정가는 316번도로 회암령을 넘어 회암사 주산인 천보산으로 하여 서성 묘의 주산인 해룡산(660.7M)을 특이하게 기봉하고 354번 지방도로 오지재고개에서 과협한 다음 산맥은 왕방산(737.2M), 국사봉(754M),동두천에 있는 소요산(539M)으로 가서 한탄강을 만나 멈춘다. 인평대군의 묘역의 주룡은 오지재고개에서 과협 한 다음 북동로 방향을 돌려 왕방산(737.2M)으로 높게 좌보토성(左輔土星)으로 기봉하고 개장천심, 기복, 박환등 수많은 변화를 하면서 진행되어 포천시내의 주산이 되고, 계속 북동 방향으로 무럭고개에서 과협한 다음 원수봉을 거쳐 대군묘의 덕령산(350M)의 중조산으로 단아하게 기봉한다.
 

중조산에서 중출로 내려온 용은 368번 지방도로를 평지로 바짝 깔려 내려오면서 수많은 요도지각을 뻗치며 위이하면서 행룡하여 야() 형국의 돌모루, 궁말 사창말등의 현무봉을 용출한 다음 후덕한 좌보 토성으로 박환하여 멈춘 다음 인평대군의 묘역에 후덕한 생기를 융취하여 혈을 결지하였다.
 

묘에서 주룡을 살피면 거대한 산줄기가 앞에서부터 뒤로 한바퀴 돌아 감아주었고 주산인 현무봉은 보이지는 않지만 중조산인 덕령산이 좌청룡 지맥으로 현무봉의 뒤에서 밀어주고 있으며, 용은 험한 살기를 모두 탈살하고 들판으로 내려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같이 지각을 뻗치며 행룡하였다.
 

물은 포천천이 축석령 고개에서 남에서 북으로 역수하여 38도선 영평천을 만나 한탄강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하천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포천천은 산의 흐름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입수도두와 선익, 순전, 혈토가 분명하게 있으며 혈 앞에서는 하수사가 우에서 좌로 감아 돌아 혈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였다. 좌우 청룡 백호는 낮지만 마치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몇 겹으로 감싸 안아 주었다.
 

특히 청룡보다는 백호가 더 발달하여 장손보다는 지손과 여자가 더 발복할 자리다. 내백호는 혈 바로 옆의 능선이며 외백호가 야트막하게 혈을 감싸면서 368번 도로까지 나가 외수구를 만들었다. 안산은 낫가리 형태로서 회룡고조의 조산인 천주산(424M)이 조금 멀기는 하지만 태봉산이 봉황새 모양으로 수려하고 단정하게 있으며, 안산 뒤 조산은 층층이 여려 층으로 감싸주면서 혈을 향해 있다. 보국 안의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덕령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나온 물이 내명당에 모였는데 서류동출(西流東出)이고 구곡육수(九谷六水)가 당전취합(堂前聚合)하였다. 좌향은 건좌손향(乾坐巽向)이며, 우수도좌의 임자장생룡으로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았다면, 풍수상에서 회자되는 최고로 귀한 대명당이며, 건해봉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야말로 대한제국 2대황제를 낳은 시초가 되는 자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현재 전하는 이야기로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산 탑 자리로 옴기고 황제에 등극했다고 하지만, 남연군이 누구인가 ? . 인평대군의 6대손인 병원의 둘째아들아닌가 ? 물은 우측에서 나와 좌측으로 흘러 외수구인 손사(巽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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