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로건설을 기피한 우리의 역사
기원전 5세기경 로마제국이 건설한 일급도로의 연장은 적도둘레의 두 배에 해당하고, 로마의 총도로연장은 적도연장의 10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동양의 중국이 건설한 도로의 연장은 로마제국의 그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 중국이 로마보다 더 발전된 나라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무튼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어느 나라 또는 지역의 발전수준을 알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것이 바로 도로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도로건설을 기피했다. 그 이유는 대단히 비관적인 것으로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인 바 도로가 없는 것이 나라의 안전에 유리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5,000년 역사에서 약 1,200회에 달하는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대륙 즉 한족이나 몽고족, 만주족의 공격이 55% 정도이고 나머지 45%는 일본을 포함한 해양세력의 공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들이 생각한 것은 도로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왕조시대에 도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가 통일신라로 통합된 이후 고려와 조선조 1천년간 6대로 ? 8대로 ? 9대로 등의 전국적인 도로체계가 있었다. 아무리 역기능이 두렵다고 해도 도로가 없이는 전국적인 통합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2. 8대로
8대로 중 1로는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 때문에 오랜 동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의주로이다. 이는 서로(西路) 또는 사행로(使行路: 사신이 오가는 길이라는 뜻) 라고도 불렸으며, 한양 ~ 개성 ~ 평양 ~ 의주를 잇는 노선이다.
2로는 한양 ~ 원산 ~함흥 ~ 회령 ~ 경흥을 연결하는 길로 관북로 또는 경흥로라 고 했다. 이 길은 국방상 매우 중요한 노선이었다.
3로는 한양 ~ 원주 ~ 대관령 ~ 강릉 ~ 삼척 ~ 평해를 잇는 길이다. 노선이 지나는 지방의 이름이나 종점의 지명을 따서 관동로 혹은 평해로라고 불렀다.
4로가 용인을 지나는 영남대로이다. 한양 ~ 광주(廣州) ~ 용인 ~ 충주 ~조령(새재) ~ 문경 ~ 대구 ~ 밀양 ~동래를 연결하는 노선으로 동래로라고도 불렀다. 이 길은 지금의 경부선과는 사뭇 다른 길이다.
이외에 한양 ~ 수원 ~ 천안 ~ 공주 ~ 삼례 ~ 전주 ~ 남원 ~ 해남 ~ 제주도를 연결하는 호남가도가 있으며, 한양 ~ 강화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고, 영남대로 중 상주북방에서 갈라져 마산과 진해를 연결하는 것과 호남가도 중 삼례에서 갈라져 순천과 여수를 연결하는 길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대로의 명칭과 노선은 시대에 따라서 또는 연구자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지기도 한다.
3. 대로의 운영과 기능
대로는 역(驛)과 역로(驛路)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역제도는 삼국시대에 성립된 후 고려시대에 틀이 잡혔다. 신라시대에는 역로의 중심이 경주였으나 고려시대에 역로의 중심은 개경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천도에 의해 한양으로 역로의 중심이 옮겨졌다. 조선시대의 역과 역로는 한양과 지방의 주요 행정도시 및 군사기지를 잇는 교통 ? 통신기관으로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내왕과 숙박,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돕는 국가기관이며 국가의 시설물이었다.
세조 3년(1457년)에는 전국에 538개의 역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를 40개 구역으로 나누어 중앙에서 파견된 찰방(察訪)이 통할하도록 하였다. 찰방이 주재하는 역은 찰방역이라 불렀다.
역은 매 30리마다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역에는 역리 ? 역졸 ? 노비 ? 역마 등과 역의 운영에 필요한 토지가 등급에 따라 할당되었다. 역마는 소수의 기마(騎馬) 이외에는 모두 진상품과 같은 관물을 수송하는 짐말 또는 조랑말이었으며 사람은 주로 걸어 다녔다.
4. 대로의 규모와 시설
개화기에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들은 역로(역로 중 주요도로 즉 간선도로가 대로임)가 말 또는 소나 다닐 수 있는 조악한 수준이었다고 기술했다. 1899년에 러시아 재무부에서 발간한 ‘KOREA’란 책을 보면 “도로에 관한한 이 지구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나라는 코리아다. 가장 좋은 도로라는 서로의 노폭은 장정 네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선 어깨 폭의 합계 정도로 약 3m에 불과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레를 사용한 서양인들에게 우리의 대로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역로는 땅의 생김새를 따라 보행 위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노폭이 3 ~ 8m로 일정하지 않았고 소나 말이 끄는 수레를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평야가 적고 산과 고개가 많다. 고갯길에서는 노폭이 넓고 경사가 느려도 소나 말이 수레를 끌고 오르내리기가 아주 어렵다.
역로가 서양사람들이 말하듯 조악했을지라도 그대로 방치된 것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역로는 수시로 흙을 깔아 통행에 도움을 주었고 경사가 급한 고갯길에서는 노면이 빗물에 깎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돌을 깔았다. ‘박석고개’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조령에는 박석을 깔았던 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역로의 요소요소에는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통행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여름에 그늘을 넓게 드리우는 느티나무가 정자나무로서 많이 가꾸어졌다. 또한 역로의 주요 지점에는 장승을 세우고 각 방면의 주요 지명과 거리를 적어 놓았다. ‘장승백이’나 ‘장승꼬지’란 지명은 이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5. 원(院)
역로의 숙박시설로는 군현(郡縣)의 객사(客舍)와 역(驛)의 관(館)이 있었으나 이와는 별도로 하급관리나 과객 또는 길손이 묵을 수 있는 원이 운영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원의 대부분은 사찰 또는 지방의 뜻있는 양반들이 설립하였다. 원에서는 음식을 조리하고 방을 데울 땔나무와 물만 제공했기 때문에 길손은 식량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원에 대한 나라의 지원은 부실하였다. 따라서 16세기 중엽부터 폐기되는 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대부분의 원이 파괴되고 말았다.
17세기부터는 정기시장(定期市場)이 확산되고 행상과 길손이 많아지며 화폐(상평통보)가 발행되어 교통의 요지에는 사설업소로서 돈을 받고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酒幕)이 등장하게 되었다. 용인의 소재지에 있는 지명 중 ‘술막다리’는 주막과 관계가 있는 지명이다.
6. 영남대로와 용인
영남대로가 본격적으로 성립된 시기는 한반도의 도로망이 경주를 중심으로 통합된 통일신라 이후이다. 그러니까 약 1,300여년 동안 오늘날의 수도권지역과 영남권지역은 이 길을 통하여 교통과 통신이 이루어졌다. 이 길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보러 다녔고, 또 많은 관리들이 이 길을 지나 다녔으며, 임금께 바치는 진상품을 위시하여 수많은 물품들이 이 길을 오르내렸다.
용인은 그 길목의 하나였다. 그러나 영남대로는 개화기를 맞으면서 쇠퇴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오늘 그와 같은 용인지역의 영남대로 길목을 다시 짚어보는 것은 여러 모로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우리는 용인의 과거를 통해 용인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영남대로는 그 연장선의 아래에 일본이 있고, 위로는 서로(西路)를 통해 중국과 연결되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제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길이다.
조선통신사 사행길
창덕궁->양재->판교->용인->양지->죽산->무극(금왕)->숭선->충주->인보->문경->
<편집인 이홍영>